2026년 6월 1일고복희0027
조선 갈모 - 비 오는 날의 고깔, 오늘의 조명이 되다

비 오는 날의 조선 사람들은 우산 대신 이것을 꺼냈습니다. 갓 위에 척 얹어 쓰는 접이식 고깔, ‘갈모(갈帽)’입니다. 접으면 부채처럼 납작해지고, 펴면 완벽한 원뿔이 되는 조선식 레인 기어예요. 골동 가게에서 이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, 솔직히 저는 비 생각보다 조명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.
만듦새는 단순하고 영리합니다. 기름을 먹인 한지(유지) 위에 가는 대살을 부챗살처럼 둘러, 접었다 펴는 구조를 만들었어요. 비가 오면 갓이 젖지 않게 그 위에 씌우고, 날이 개면 착착 접어 소매나 봇짐에 넣었습니다. 종이와 대나무로 만든 우비가 백 년 넘게 살아남아 지금 제 앞에 서 있다는 게,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에요.
개항기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은 이 땅을 ‘모자의 나라’라고 불렀습니다. 신분·나이·직업 따라 쓰는 모자가 다 달랐으니까요. 2019년 뉴욕에서 열린 전시 제목도 ‘조선: 모자의 나라’였는데, 갈모는 말하자면 그 모자 왕국의 공식 레인 기어였던 셈입니다. 모자를 지키는 모자라니, 어쩐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나요.
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원뿔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? 저희가 가장 사랑하는 쓰임은 조명입니다. 기름 먹은 한지는 빛을 머금으면 속살까지 은은하게 밝아져서, 낮은 무드등 위에 살짝 얹어 두면 방 안에 따뜻한 원뿔 하나가 떠오릅니다. 실제로 저희 아틀리에에서도 갈모는 우비가 아니라 조명 갓으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어요. (열이 많은 전구만 피해 주세요. 이 아이, 종이입니다.)
조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. 갈모는 그 자체로 완벽한 원뿔 — 접부채의 리듬이 새겨진 기하학 오브제입니다. 특히 USM 모듈장이나 스테인리스 선반 같은 차가운 현대 가구 위에 딱 하나 올려 보세요. 금속의 매끈한 면 위에 백 년 묵은 종이 원뿔이 앉는 순간, ‘힙’과 ‘골동’이 한 화면에 잡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됩니다. 미니멀한 공간일수록 효과는 더 큽니다.
박물관과 전시 속 갈모
박물관 수장고와 전시장에서도 갈모를 만날 수 있습니다. 김해민속박물관 소장품(e뮤지엄), 뉴욕 전시 도판, 전통문화포털의 기록을 함께 모셔 왔어요. 펼친 모습, 쓴 모습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.
참조 이미지 출처: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(emuseum.go.kr) · 뉴욕한국문화원 ‘조선: 모자의 나라’(koreanculture.org) · 전통문화포털(kculture.or.kr, 공공누리 출처표시). 이미지를 누르면 원문 페이지로 이동합니다.
비 오는 날 갓을 지키던 물건이, 이제는 마른 방 안에서 빛을 지키고 있습니다. 다음 비 오는 날, 저희 아틀리에에서 갈모 아래 은은한 불 하나 켜 두고 기다리겠습니다. :-)
상세 정보
- 시대
- 조선 후기~근대
- 재료
- 유지(기름 먹인 한지), 대나무살
- 용도
- 갈모(雨帽) — 비 올 때 갓 위에 씌우던 접이식 비 가리개
- 조형 특징
- 부챗살처럼 접히는 원뿔형, 유지의 은은한 반투명 결
- 거래
- 비매품 — 소장·아카이브
- 소장품번호
- 고복희0027
스타일링 제안
무드등 조명 갓, 원뿔 기하학 오브제, USM·스테인리스 선반 위 연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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